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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樹千年終是朽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턱 앞에 멈춰선 발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시간만 밟고 서 있었다. 손바닥 반 뼘의 길이도 채 되지 않는 얇은 문 사이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구분 지어지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이게 뭐가 그리 대수냐며 걸음을 내디뎠겠으나 이젠 홑몸이 아니었기에. 나 하나만을 생각할 수만은 없어 경계 앞에서 그저 망설이고만 있었다.

 

  나는 존재 자체로도 죽음을 몰고 다니는 것이었던가.

  어찌하여 내가 가는 발걸음 걸음마다 지척에서 죽음이 속삭이는가. 가까이에서 죽음이 도사린다면 이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주셨어야지. 하늘은 어찌 이리도 무심하단 말인가.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면 이를 뚫고 지나가게는 해줬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럴 능력도, 의지도 있는데. 왜,

  대체 왜 나는 방관자로만 그치는 것인지. 언제나 같은 자리에 멈춰 서있었으나 마음에 품은 모든 것들은 나와 같이 멈춰 있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스쳐 지나가는 것이 찰나와 같아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그렇게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야만 했다. 그렇게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수 없이 단념했건만.

  이제는 너라는 풍파가 나를 몰아치는구나. 너는 나를 기어코 절벽 너머로 밀어버린다. 한 번을 잡아주지 않고.

 

  한참을 망설이다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 짧으나 먼 복도 위로 무거운 걸음을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갈수록 코끝으로 옅은 향냄새가 스치는 기분이었다. 아, 이것은 너의 향이던가 아니면 죽음의 향이던가.

 

  빈소에 앉아 향을 피우던 사람은 항상 너였다. 넌 나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앉아 다른 이들의 죽음을, 스쳐 지나가는 이들을 지켜만 봤다. 죽음의 진척에 있었으나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은 사람. 적어도 이 점에서는 우리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라는 착각 속에서 살았던 것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세월 앞에선 무쇠 철도 녹슬고 부러져 재가 되어버리는데 사람이라고 달랐을까. 난 그저 내가 만든 환상 속에 너를 가두고 괜찮다 방치한 꼴에 지나지 않았다. 네 오만함이, 너의 자만심이 나를 추켜세우고 너를 빛나게 했다. 우리는 세월의 어느 한때 잠시 빛났고 이젠 그 빛을 잃고 추락만 남겨둔 것이었다.

 

 

  입구에서 망설인 것과는 다르게 문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방 안에서 밖으로 불어나오는 바람결에 복도에서 느껴졌던 향냄새가 확연히 배여 있는 것을 느끼고는 순간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건 죽음의 향이 아닌 너의 향이다. 진심을 속삭이며 내게 절망만을 안겨주었던. 떠나려 한 나의 발목을 잡았던 것처럼. 너의 향이 지금이라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어진 내가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게 막아 세운다. 물론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뿌리치고 갈 수 있었으나,

  선택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으니. 너의 곁에 남는 선택을 한 것도 네가 주는 상처를 묵묵히 받아내겠다는 선택을 한 것은 나였으므로. 이 모든 선택이 내가 너를 힐난할 자격조차 없다는 걸 입증하고 있었기에 끝내 남은 길을 나아간다. 겉으론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내 의지가 아닌 것처럼 보여야 네가 상처받을 테니. 나는 언제나 피해자로 너는 가해자로 남아 서로를 할퀴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겉으론 멀쩡한 척 속으론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며. 나는 내 죄책감을 네게 쏟아붓고 너는 그 죄책감을 이용해 나를 네 곁에 둔 것이었다.

  잘못된 만남. 그렇다, 우리는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인연이었다. 그랬다면 난,

 

   "...원소."

 

  병상 앞에 조용히 주저앉으며 네 이름을 속삭였다. 불 하나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 가슴 위쪽으론 옅은 천으로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가린 채 이불 위로 앙상하게 마른 손만 올려둔 너는 미동도 없이 나를 맞이한다.

 

   "나를 보자고 했다며. 왔으니까 할 말 있으면 해."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들려오는 숨소리마저 없는 것 같은 이상한 정적에 불안이 치솟아 너의 얼굴을 가린 천을 치우려 손을 뻗으면 팔 위로 힘없이 뼈대만 남은 손이 올려졌다.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채로 그저 내 팔 위로 올려진 손의 주인은 조심스럽게, 아니 잘게 손을 떨며 내 손을 잡아 왔다. 얼음보다도 차가운 한기가 손끝을 타고 넘어온다. 나는 그 손이 이끄는 대로 힘없이 다시 바닥에 주저앉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방금은 무례했어." 

   "그건 네가 반응이 없으니까-"

   "...혜인."

 

  갈라진 정도가 아니다. 힘이란 힘은 완전히 다 빠져버린 채로 어떻게 이 상태로 숨을 쉬고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툭 내뱉어진 말, 음절 하나하나에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바닥이라도 보여주겠다는 듯 끝도 없이 추락한다. 그런 내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맞잡은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며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비록 두드린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갑자기 네가 여남으로...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나더군."

   "지금 나랑 추억 팔이라도 해보자는 거야 여기서?"

 

  그는 웃는 것인지 기침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숨을 뱉어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어째서 다 지나간 옛이야기를 태연히 꺼내는 것인지.

 

   "넌 처음 만났던 날 때부터 그랬어. 언제나 내 곁을, 주변을 맴돌며...시도 때도 없이 내게 손을 내밀었지. 어쩌면 네가 그랬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널...더 곁에 두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넌 처음부터 맹덕의 사람이었으나 내 앞에선,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온전히 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이건 그저...내 착각이었던가?"

 

  그의 질문이 조용히 날아와 마음에, 심장에 정확히 꽂힌다. 추억팔이가 아니라 감정놀음을 하자는 것일까. 이제 와? 대체 무슨 연유로? 알 수 없는 감정이 요동치며 심장을 휘감는다. 밀려오는 답답함에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가슴으로 가져가면 묵직한 무게감이 목 끝까지 차오르며 숨통을 휘어잡는다. 숨 막힘. 이는 두려움의 감정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네가 그걸 몰랐을 리 없지.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안에서도, 서주에서도, 그리고 지금까지 순전히 네 욕심 하나로 날 붙잡고 있는 거잖아. 난-" 

   "너도 알고 있었지. 그래, 너도나도 서로에 대해...명확하게 알고 있었어."

 

  그래, 너무 잘 알았다는 게 문제였겠군. 라며 네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알지 못했다고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척도 할 수 없어 그저 입술만 꾹 다물면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엄지를 훑어 내려왔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그리고-

  괜찮다는 듯. 이제 와 심심한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병상에 누워 있는 이가 멀쩡히 앉아있는 나를 향해. 지금 누구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인지 네가 알고도 이러는 것일까. 경중을 따질 일이 무엇인지 알고 이러는 것일까.

 

   "...늦었어. 이런 대화를 하는 것도 이젠 아무 의미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내게 다정하게 굴지 않아도 돼. 네 몸이 호전되어 네가 일어나면 그땐 군소리 없이 들어줄 테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아쉽게 되었군. 그건 들어주지 못할 것 같으니."

 

  그의 말에 쿵 하며 다시 한 번 심장이 내려앉는다.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가 너무 무거웠다. 숨 쉴 새도 없이 두 어깨를 내리찍는 무게감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세게 그러 쥐었다.

  너무 오래 있었다. 너무 오래, 오랫동안 그의 옆에 있었다. 목소리, 숨소리 하나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어버렸으니. 어쩌다 네 목소리에 잠겨 같은 숨을 쉬게 되었을까. 내가 어쩌다,

어쩌다 네게 이렇게까지 깊이 발을 담고 있었단 말인가.

 

   "거짓말... 하지 마. 뭘 들어주지 못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지껄여."

 

  네가 언제 한 번이라도 내 부탁을 제대로 들어준 적이나 있어? 라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해. 라는 독촉엔 그저 맞잡은 손의 손가락을 움직여 손등을 쓸어내릴 뿐. 차라리 나를 비난이라도 했으면.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책사라 힐난이라도 했으면.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가슴이 짓눌리는 기분은 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진짜 해야 할 말은 지금부터니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는다.

 

   "곧 있으면 순선생님이 올 거야. 너는 순선생을 따라 이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네 말을 끊어내야 하는데, 아까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네게 당장에라도 뭐라 말을 해야 하는데, 너의 가는 숨결이 힘없는 그 손과 함께 날 붙잡는다. 감히 네 말을 끊을 엄두도, 시도도 하지 못하게 나를 부여잡고 망부석이 되어 앉은 나에게 선고한다.

 

   “돌아가. 원래...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다시 한 번, 알 수 없는, 묵직한 돌덩이가 심장 위에 올려진다. 그토록 듣고자 한 말이 아니었던가. 이 한마디, 이 한마디를 듣고자 지금까지 네게 그리 모질게 굴고 나 자신을 괴롭혀왔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토록 바라왔던 말이 지금은 왜 이리도 야속하게 느껴지는지.

 

   “왜, 이제야 내가 쓸모가 없어졌어?”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나를 조롱한다. 아니, 들려오는 건 그의 웃음소리가 아닌 나의 웃음소리였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결국 이 모든 것을 초래한 건 나 자신이라며, 내가 나에게 속삭인다.

 

   “조선생님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때일수록 더더욱 날 필요로 해야지. 네 위상이 흔들리는 이 지점에서, 너의 세력이 두 갈래, 세 갈래로 찢기는 이 시점에 너를 대신할 수 있는 날 필요로 해야지. 그런 말은 내가 네게 내 오라비의 목숨을 구걸했던 그 날에 했어야만 했다는 걸 네가 나보다도 더 잘 알았을 텐데?” 

   “맞아, 진작에 했어야 했거늘... 그러니 더 늦기 전에 하려고. ...이게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니까.”

   “넌...항상 제멋대로 판단하고 멋대로 행동하고-”

 

  내 말에 그의 웃음소리가 정확하게 귓가를 파고들어 온다. 환상 속의 내 목소리가 아닌 그의 숨결이, 그의 소리가 귀를 파고들며 목을 옥죄이는 손을 풀어준다. 서로에 대한 비밀이 너무나 많아 언제나 자기가 하고 말만 하는 사람과 그 사람에게 순종만 하는 사람.

우리가 조금이라도 서로에게 솔직했더라면.

 

   “넌 방금 네가 한 말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건지 영원히 모를 거야.”

 

  웃음이란 가면으로 속인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수만 있었더라면.

 

  그러한 가정이 또다시 나와 그를, 그리고 현실을 합리화하려 한다. 난 그에게 하지 못할, 아니 할 수 없게 된 미안함에 배 위로 손을 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가, 절대로 용서하지 말렴. 나로 인해 너의 아비는 네 존재를 모르는 채로, 너는 불완전한 버팀목 하나에 의지한 채 지옥을 거닐게 되었으니.

 

  무거운 침묵 아래 서로의 손을 놓을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알려오듯 저 멀리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이 다가올수록 그는 나를 놓기 위해 손에서 힘을 빼고 나는 그런 그를 놓치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손을 더욱 세게 그러 쥐었다.

  이전과는 완벽하게 전도된 상황에 차라리 저 발걸음이 나를 스쳐 지나가길 바라고 또 바라보나 그런 내 간절함이 무색하게도 어김없이 문이 열렸고, 방 안으로 들어선 인물인 순선생, 우약은 나와 시선이 마주하자마자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짧게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개를 돌려 허공의 천을, 천 너머의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살아. 이게 내가 주군께 올리는 마지막 간언이야.”

 

  손을 놓았다. 내가 바라는 치세를 보여주겠다며 함께 장안으로 가자며 내게 내밀어 졌던 손을, 기주에서 오라비를 따라가야 망설이는 내게 떠나지 말라며 자신의 곁에 있으라며 나를 붙잡았던 손을, 나의 이상이 죄악이라는 구렁텅이로 빠져 실의에 처해있었을 때조차 내게 손을 내밀었던 그의 손을

결국, 내가 먼저 놓아버린다. 그렇게, 난 한 번도 그를 붙잡아 보지 않고 놓아버린다.

 

  향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한 걸음 멀어지다 멈춰서 피나 날 정도로 세게 그러쥔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끝까지 참으려고 두 입술을 잔뜩 깨물었건만. 못 참고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제길, 젠장. 빌어먹을...!

 

   “야, 너 죽기만 해. 어? 죽기만 해 보라고. 정 죽고 싶으면 전에 네가 약속했던 대로 내 손에 죽어. 네가 이렇게 누워있는 거 꼴사나워서 더 이상은 못 보겠으니까, 지금은 네 바람대로 떠나줄 테니까 넌 자리 털고 일어나자마자 날 찾아. 난-”

 

  너랑 이렇게 끝나기 싫어. 라며 진심의 끝자락을 들춘다. 동시에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천을 들추며 그의 얼굴을, 눈을, 코와 입술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숙여 그의 입술에 입술을 맞댔다. 말라 거칠어진 입술을 혀로 훑어내리다 천천히 벌어지는 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그러나 거침없이 파고들어 짧게 그에게 내 흔적을 남기고 난 그의 흔적을 가져왔다.

 

   “...끝까지 못 말리겠군.”

 

  한껏 탁해진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래, 비웃을 테면 실컷 비웃어. 나도 똑같이 그래 줄 테니까.

 

   “인사 따윈 안 해. 나한테 그딴 거 바라지 마.”

 

  그러니까 이건 내가 널 다시 만나는 날에 돌려받을 내 마음인 거야. 라며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훑고 훑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나는 그가 내게 무언가를 중얼거리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 앞에서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으나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순선생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는 또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끝내 말씀은 못 드렸습니까?”

 

  우약이 내게 말고삐를 넘겨주며 물었다. 난 가진 짐이라곤 하나 없이 홀로 말 위에 앉게 한 지난날의 세월이 문뜩 우스워져 우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통 말을 못 하게 하셔서. 어쩌겠습니까. 이 또한 하늘의 뜻일지. 그리고 순선생님도 아시잖아요. 그가 알아봐야 나와 뱃속의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어디로 가실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우약의 질문에 말고삐를 당겨 말을 몰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가 바란 대로 갈 생각입니다. 제가 어찌 주군의 명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으나. 뻔뻔스럽게 어찌 오라비를 찾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 오랜 기간 수없이 오라비에게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가지 않았던 나인데. 오라비가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 준 적 없는 나인데. 이제 와 내 목숨 하나 구걸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다니.

  아니, 그를 찾아가면 적어도 나 ‘하나’만의 목숨은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태중의 아이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아만이라면 친우와 동생의 아이라며 살려줄 수도 있겠으나,

  조조라면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제 동생의 배를 걷어차서라도 아이를 죽이려 할 테니. 그럴 수는 없었다.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만큼은 살려야 했다. 그러고 싶었다.

 

  그러니 우약을 통해 내 행선지를 전해 들을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만 하는 것이다.

 

   “다음에, 더 좋은 날 뵙겠습니다. 순선생님, 그때까지 몸조심하세요.”

 

  조선생님도요. 라는 말을 뒤로 한 채 빠르게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말이 바람을 가르고 땅을 박차며 달렸으나 어쩐지 속도가 붙지 않는 기분이었다. 말고삐를 더 내리치면 애꿎은 말만 괴롭히는 꼴이라 내리치는 대신 고삐를 손에 감아 꽉 쥐었다.

 

  내가 바란 치세와 나의 이상은 내가 붙잡지 못한 그의 손처럼 한 떨기의 꽃잎처럼 떨어짐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무나 어여뻐 상록수처럼 그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줄만 알았는데. 실없는 바람이었고, 헛된 꿈이었다. 松樹千年終是朽. 소나무는 상록수이나 천 년 후에는 말라 죽는다. 그러니 천하의 만물에 죽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진 공허 속에 남은 나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너를 잃은 내가 서 있을 틈이 단 한 군데도, 이 넓은 대륙 위에 단 한 곳도 없다. 너의 그림자를 밟고서 내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았더니 네가 사라지고 나니 내 것이 하나 없었다.

 

  이제 와 인정한다. 너 없인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네가 나를 ‘나’로 만들었다는 것을 시인한다.

  뒤늦은 깨달음에 내 심장을 옥죄이던 그의 손길이 흐릿하게 사라진다. 그 생경한 감각에 울컥 목을 메웠던 한숨이 흘러나오며 두 눈시울이 화끈거림과 동시에 볼을 타고 참았던 눈물이 봇물이 터지듯 흘러내렸다. 새어 나오는 나의 울음은 바람이 삼키고 눈물은 땅이 지운다. 어디 하나 남을 수 없는 흔적에 어쩌면 더 마음 놓고 털어놓는다. 누구도 볼 수 없고 기억하지 못하니. 의미 없는 발악을 하는 것이었다.

 

  정처 없이 말이 달린다. 나는, 그 백지상태의 도화지 위로 천천히, 간절한 마음을 담아 누군가를 그린다. 이 선택이 또 다른 죽음의 길로 나와 주변 이들을 이끄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으나 다른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나 다름없었으니. 이제 이 세상에 조혜인이란 사람은 죽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난 앞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살아있었음을 기억할 존재를 위해, 그가 내게 남긴 마지막을 위해 뭐든지 할 것이다.

  설령 모든 이들에게 미움받을지라도.

 

   “그러니 아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가 모두의 죽음이 되어줄 테니, 너도 살아다오.

 

 

 

  바람을 타고 쉼 없이 말을 몰아 네게서 점점 멀어진다. 하늘 위의 구름을 잡을 수 있을 만큼 빠르게. 그렇게 너를 뒤에 남기고 나는 나아간다. 말의 발자국 하나에 너와 나의 시간과 기억들이 짓밟힌다. 그렇게 내게 남아있던 너의 모든 흔적을 땅에 내려놓으나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떠나는 건 우리의 육신이지 마음만은 남을 것이라고. 넌 언제고 다시 내게 손을 내밀어 줄 것이라고. 감히 바라본다. 그리고 맹세한다. 그럴 때마다 절대로. 다시는,

 

 

  네 손을 놓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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