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Fate Grand Order는 결말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선이 많이 다릅니다.
길고 긴 여행이 끝나고 함께 있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에서, 복도에서 나란히 선 채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색한 공기, 내려앉은 분위기에 그저 주먹만 꽉 쥐었다 폈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남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타다 남은 재처럼 꽉 쥐면 부스러질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아가씨, 무슨 생각해?”
그 생각의 연쇄를 끊은 것은 역시나 푸른 머리의 창병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깜빡이다가 그를 바라보니 무언가 후련한 것처럼 웃으면서도 애매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지었지? 그것은 이제 와 기억할 수 없었다. 애초에, 스스로 표정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의 눈을 그때 제대로 바라보았다면 자신의 표정도 알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해봐도 다 지난 일이었기에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싶어서요.”
“그렇게 노력해서 얻은 미래인데, 별로 기뻐 보이지는 않네? 나랑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와서 그런가?”
“농담도. ……. 그게 없는 건 아니네요.”
그래? 의외네. 하하, 호탕한 웃음이 복도에 울리다 사라졌다. 그동안 전하지 못했었던 말도 지금이라면 용서가 되지 않을까. 그의 웃는 표정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저번처럼 마지막인 줄 알고 겨우 진심을 고백했는데, 알고 보니 끝이 아니었다는 그런 것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 공식적으로 우리의 여행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어야만 했다.
후련한가? 그런 의미로 생각해보자면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와 언제나 가까이 있었으니까. 언제나 작별을 생각했지만, 막상 닥쳐온 작별의 날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펼쳐진 해안선을 보며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가진 지식을 이용해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 모든 것에 그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기, 랜서. 약속 하나만 해줄 수 있어요?”
“곧 퇴거해서 기록으로만 남을 영령에게 지금 하는 약속이 의미가 있어?”
“없어요, 하지만 있기도 해요. 나에겐 더 의미 있게 되겠죠.”
다만 기억나는 것은 그 말을 한 뒤 자신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심호흡을 한 뒤,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눈, 그 눈에 비친 자신은 분명 활짝 웃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좋아하는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고 싶은 모습. 이다음에 할 말은 분명 당신에게도 내게도 잊지 못할 상흔으로 남겠지만,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다음은 없을 거고 나와 당신이 만날 일은 이제 영영 없겠지만. 무수히 많은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우리의 인연을 잊어주세요. 반드시.”
“이유는?”
“지금 이 기억, 이 순간에 작별하는 게 우리가 했던 사랑이니까요. 부디 영원히 변색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빛나는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해주세요.”
“정말 아가씨다운 부탁이지만…. 그런 얼굴로 말하면 영 이쪽이 약해진단 말이지. …이생에 맹세(Geis) 할게.”
“고마워요, 잘 가요. 랜서. …나의 대영웅, 쿠 훌린.”
“잘 있어, 아가씨.”
맹세와 인사하는 것을 끝으로 빛무리가 되어 사라지는 그를 보고 겨우 주저앉을 수 있었다. 후련한 게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보다는 사실…. 울고 싶었다. 유일한 나의 이해자, 영원함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작별이라는 것에 익숙한척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몇 번이고 눈물이 나오는 것을 눌러 참았던가? 서로에게 기록으로만 남을 존재, 영령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그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굳이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을 굳이 마지막 순간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자신의 미련을 끊어내기 위함이라고 자신을 스스로 위로했다. 그를 잊을 일 같은 것은 없고, 그와 함께한 시간이 변할 리도 없었지만, 미련이 생기면 빛나는 추억은 저절로 퇴색되기 마련이었다. 덧씌워진 기억들이 온전할 리는 없었으며, 기억들이 왜곡됨과 동시에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살아갈 그의 존재가 일그러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담담한 척은 했지만 그런 말을 한 것이 아주 조금은 후회가 되어서 그렇게 한참이나 소리 없이 울었다.
계절을 보는 것에 있어 크게 차이를 관찰할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한여름 밤의 꿈이 끝나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