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유리로 햇살이 들이쳤다. 해피엔딩을 고하는 문장처럼 부드러운 햇살이었다. 카페 안에는 유행을 벗어난 피아노 음색이 커피 향과 함께 부드럽게 떠다녔다. 마른 목 안을 덥히며 내려가는 커피 한 모금, 하얀 커피잔처럼 백색으로 가득 메워진 원고지. 사전을 펼치면 「평화」라는 단어에 예시로 실려 있을 일상적인 풍경이었으나, 겐타로는 초조한 듯 손톱 끝을 세워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곱게 정돈된 손톱 아래 둔탁한 노크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그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창밖으로 수많은 사람이 등장했다가 퇴장한다. 겐타로는 초록색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다 습관적으로 한 명에게 눈길을 틔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에는 환상으로 도망치는 것도 꽤 도움이 되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활기차게 뛰어다니고 있는, 일곱 살은 되었을 법한 어린 남자아이. 이 아이는 사실 10년 전 우주인이 지구에 심어둔 스파이다. …거짓말이지만.
시선을 조금 옮겨, 오늘의 진짜 주인공인,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곰 인형 탈. 이 사람은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서민 속에 섞여 생활하는 시험을 겪고 있는 먼 이국의 왕자다. …이것도 거짓말이지만.
그리고 또 시선을 옮겨, 저 선명한 녹색 투피스를 입은 여자는.
“유메노 겐타로의 유작이자 후세에 길이 전해질 걸작 ‘그녀’의 주인공이자 모델, 소노하라 쿄코.”
……거짓말이라면 좋겠지만.
겐타로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척 천천히 시선을 천장으로 도망쳤다. 천장에 그려진 규칙 없는 무늬를 훑어가다 먼지 앉은 조명에 눈길이 닿았다. 유리 장식이 달린 원형 형광등은 먼지를 머금었어도 새하얗게 빛났다. 시리도록 파란 빛이 아파서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사이, 그녀가 손톱을 세우고 유리창을 두드렸다.
톡톡, 톡톡. 바로 등 뒤에서 울리는 노크 소리를 이제는 무시할 수 없었다. 겐타로는 방금 알아봤다는 듯 시침 떼며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어머, 쿄코가 왔군요.”
가식적으로 가늘어지는 눈매에 화답하듯 그녀가 허리를 숙여 겐타로와 눈을 맞추었다. 태양을 등지고 있는 그녀의 그림자가 얇은 베일처럼 겐타로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겐타로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아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새어든 가느다란 빛이 뺨의 실루엣을 비추고 있었다. 턱은 잘 그은 선처럼 부드럽고 반듯했다. 그늘에 잠겨 있으면서도 목은 하얗고 얇았다. 그리고.
그리고 뒤에는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을 텐데도 그녀의 「소매 끝을 잡는 두 손가락의 떨리는 힘만큼 처연한 눈」은 보이지 않았다. 망사가 길게 늘어진 모자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도 그녀의 얼굴 위에는 정갈한 글씨로 문장이 쓰여 있을 뿐이다.
「아침부터 집 안팎이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줄곧, 몇 번이나 읽었던 문장이었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겠지만.
이제는 눈을 감고도 읽을 수 있을 그 문장이 오늘은 눈에 스미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정말로 눈을 감고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겐타로는 굳이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러기 전에 그녀가 먼저 창문 안에서 퇴장했다.
이윽고 종소리가 딸랑, 낭랑하게 울리며 카페 문이 열렸다. 그녀는 웨이트리스의 접객에 대꾸도 않고 겐타로가 앉은 자리에 꼿꼿하게 눈길을 못 박았다. 그녀가 구두 굽을 울리며 걸어오자, 휴대폰을 보거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아주 잠깐 머물고는 초침이 움직이기도 전에 다시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특이한 옷차림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외모 때문이리라. 정작 겐타로는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겐타로의 맞은편에 앉았다. 치맛자락이 날리지 않도록 단정하게 모아 앉고는 손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은 아직 고난이 거치지 않아 매끄러웠다. 빈 원고지를 가리던 겐타로는 문득 제 손에 박인 굳은살이 눈에 띄어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어차피 손을 펴고 있더라도 아무것도 쓰지 못한 원고지는 가릴 수 없을 터였다.
「좋은 오후네요.」
감탄을 닮은 인사였다. 평소였다면 겐타로는 “네, 그렇네요”라고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이토록 좋은 날씨에 관해 이야기하며 한 페이지를 꽉 채울 날씨 묘사를 읊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신경이 온통 새하얀 원고지에 가 있었다. 겐타로는 입술을 뗐다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작게 짓씹은 입술의 색깔이 진하게 번졌다가 핏기가 빠졌다. 몇 번이나 고르고 골라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결국, 그는 주먹을 펴고 빈 원고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빨갛게 나누어진 빈칸을 바라보다 겐타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겐타로는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을 눈동자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숨소리는 편안했다. 손을 까딱거리지도, 한숨을 쉬지도 않았다. 그러나 얼굴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것만으로는 그녀의 상태가 평온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겐타로는 “아,” 하고 말했으나 목이 마른 탓인지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겨우 침을 삼켰다.
“쿄코, 할 말이 있어요.”
이제부터 할 말은 퇴고 없이 마침표를 찍고 완결을 맺는 일이었다. 거짓말이나 초고라며 웃어넘길 수도 없었다. 겐타로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손을 들어 원고지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손톱 끝에서부터 잉크가 새어 나와 단어를 이루었다. 그러나 원고지에 스며드는 문장은 모두 불완전했다. 글자로 나오던 잉크는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자마자 형태를 잃고 무너져 원고지를 새까맣게 적셨다. 뒷장도, 그 뒷장도 축축하고 너덜너덜하게 젖어 들었다.
그녀는 손을 떼고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망사가 머리카락을 긁으며 사라락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모자를 무릎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유메노 선생님, 저는 알고 있어요.」
그 말에 겐타로는 덜컥, 숨이 멈추었다. 쿄코, 그게 아니에요, 라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엇도 온전하게 적히지 못한 원고지에 손을 얹었다.
「선생님은 평생 제 이야기를 쓰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이 글자였다면 ‘평생’이라는 단어에 볼드나 이탤릭 효과가 적용되어 있었으리라. 그녀의 목소리는 초여름 햇살처럼 선명하고 단정적이었다. 따갑지는 않았다. 눈 뒤쪽까지 알싸하게 시려오는 새파란 색채와, 녹색으로 퍼지는 볕의 분명한 열기처럼, 묘하게 고양되면서도 현기증이 일고 마는 목소리였다. 그것이 그녀를 녹이듯 원고지 위에 놓인 손이 조금씩 까맣게 물방울지더니, 이윽고 문장으로, 단어로 바뀌어 녹아갔다. 겐타로는 황급하게 그 손을 잡았으나 무게감이 조금도 없는 글자는 금세 사라졌다.
“꼭 그래야만 하나요, 다른 전개로 이어질 수 없는 건가요.”
그는 점점 녹아내리는 손을 두 손으로 쥐었다. 소중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하지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힘주어서. 그녀를 보는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녀는 반도 남지 않은 손으로 겐타로의 손가락을 옭아매어 깍지를 꼈다.
「선생님.」
그녀는 비로소 색채가 깃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그들을 만나고 작풍이 바뀌었죠. 더는 불행한 여자의 일생 같은 건 쓰지 않으실 거예요. 그렇죠?」
이번만큼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첫 마디에서 들통날 거짓말은 의미가 없었으므로.
약속된 명예를 생각해 만년필을 들어도, 겐타로는 원고지를 열 장도 채 채우지 못하고 전부 찢어버렸다. 두 사람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미 원고를 완성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러나 겐타로는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싸우는 사이에 깨닫고 말았다.
누구나, 아메무라 라무다와 아리스가와 다이스마저, 해피엔딩을 열망한다는 사실을.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도 하얀 뺨도 진녹색 투피스도 잉크가 되어 실처럼 풀리며 공중에 녹았다. 한 사람에게 다 담기에는 너무나 많았을, 향년 스물넷으로 끝났을 비극이 소리도 없이 사라져갔다. 마침내 그녀의 얼굴에 쓰인 문장도 한 글자 한 글자씩, 무너졌다.
「저는 이 변화가 좋아요. 오늘은 선생님이 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기쁨에 겨운지 숨을 한 번 몰아쉬었고.
겐타로는 눈을 크게 떴다.
“아침부터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답니다.”
입술이 보였다.
끝이 내려앉은 눈매와 빛이 번지는 콧대도 보였다.
그녀의 사라진 일생과 달리, 유쾌하고 아름다운, 한평생 불행 속에 살아가리라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미간이 좁혀지며 눈이 젖어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지만, 겐타로는 기꺼이 미소를 보여주었다.
“드디어 당신을 보네요. 이런 얼굴이었군요.”
화답하듯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럼, 겐타로, 안녕히.」
소노하라 쿄코가 내뱉은 문장은 포말처럼 금세 부서졌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는 그림자가 없이 햇살만이 들이치고 있었다. 해피엔딩을 고하는 문장처럼 부드러운 햇살이었다.